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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와 토우코의 3번째 자유행동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자유행동 내용을 모르신다면 이해에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후카와 토우코는 과거에 결심한 바가 있었다. 다시는 영화관에 가지 않겠노라고.

 

그때를 떠올리려 하면 기억은 조각난 채 단편적으로 떠오른다. 오래된 일인 탓도 있었고, 그닥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인 탓도 있었다.

 

옆 반 남자애에게 받은 데이트 신청. 3일 밤낮을 고심해 세운 데이트 계획. 덕분에 데이트 당일에 끌고 나가야 했던 피로에 찌든 몸. 손에 들린 두 장의 영화표. 어두운 상영관 안으로 함께 들어가던 순간. 스크린에 닿아 퍼지는 빛. 영화의 시작. 영화의 끝. 하얀 글자로 채워지는 스크린. 끝나지 않을 것처럼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엔딩 크레딧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를 나섰다. 그러나 후카와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글자가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건 엔딩 크레딧 뒤에 나오는 영상을 기다리기 위함도, 엔딩 크레딧을 끝까지 보는 버릇이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좋으니 이 순간을 이어나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그녀는 영화관에 홀로 앉아있었으니까.

 

남자애는 영화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영관을 나갔으며, 데이트를 신청했던 건 벌칙 게임일 뿐이었다는 사실은 그 다음 날에 알게 되었다.

 

데이트 신청을 받았을 때, 결국 이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몰랐던 건 아니었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알고서도 넘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속지 않겠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렇지만 어쩌면, 이라는 생각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에는 균형을 잃고 자신이 더 믿고 싶은 쪽으로 굴러떨어진다.

 

후카와 토우코는 만성적인 로맨티스트였다. 낭만을 추구하는 건 버릇 같은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기질은 그런 식으로 종종 바깥에 드러나고는 했다. 그리고 대부분이 이런 결말을 맞는다. 어두운 공간 속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낭만은 유리 공예품을 닮았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비유가 있을 수 있고, 그중 어떤 하나를 정답이라고 특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카와는 그 비유가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낭만은 유리 공예품을 닮았다. 아름답고, 섬세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결코 빛을 발하지 못하는.

 

낭만이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바닥을 구른다. 황홀한 빛을 반짝였던 유리는 어둠 속에서 더 이상 빛나지 못한다. 어두운 상영관에서 비어있는 옆자리를 확인했던 순간, 후카와는 유리 조각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결심을 했다. 자신은 현실에서 낭만을 바랄 수 있는 부류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므로.

 

 

 

 

후카와는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쓸었다. 바닥이 유난히 번들거렸다. 아마 대걸레질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이른 아침이었으므로. 멀지 않은 곳에서 달달하고, 짠 향이 뒤섞여 풍겨왔다. 큰 소리로 떠드는 학생 두세 명이 그녀의 뒤로 지나갔다. 후카와는 눈만 굴려 흘끔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에 사람은 그닥 많지 않았으나, 그녀에게 불편함을 안겨주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벌어진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후카와는 지금 영화관에 서 있었다. 그러나 결심을 무르고 쓸데없는 희망을 걸었기 때문에 이곳에 서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이유는 단순했다. 약속이 생긴 것이다.

 

후카와는 제 옆에 있는 마이조노를 쳐다봤다. 마이조노는 극장에 걸린 영화 포스터를 하나씩 훑어보는 중이었다. 아직까지 무슨 영화를 볼지 고르지 못한 탓이었다.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보는 일을 막기 위함이었다. 아침 일찍 영화관에 온 것도 사람이 적은 시간대를 노린 것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그녀를 알아본다면 곤란해지므로.

 

후카와는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다시 영화관을 둘러봤다가, 이번에는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영화관이란 결코 좋은 장소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 장소를 영화관으로 잡은 이유는, 그래도 다른 장소보다야 영화관이 나았기 때문이었다. 불필요한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되고, 굳이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 마이조노와 만날 장소로 이보다 완벽한 곳은 없었다. 후카와에게 마이조노는 껄끄러운 상대였으니까. 싫은 장소와 껄끄러운 사람이 합쳐져서 최고의 조합이 되다니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아닐 수 없었다.

 

후카와가 마이조노를 껄끄러워하는 이유는 아주 많았다. 나열하자면 끝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마이조노가 무슨 속셈으로 제게 살갑게 구는 것인지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는 상대방을 대하는 방법 또한 알 수 없게 마련이었다.

 

처음에는 어떤 목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이미지 관리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목적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마이조노와 지내게 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비록 그것이 마이조노가 일방적으로 다가온 것이었으며, 후카와가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녀와 함께 지내게 된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함께한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고, 그건 후카와가 그녀를 파악하기에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다. 후카와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이조노에게서는 어떠한 악의나 꺼림칙한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번 의문이 생긴다. 특별한 목적이 없다면, 마이조노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제 곁에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문제는 원점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속셈은 알 수 없고, 껄끄러운 상태가 지속된다.

 

껄끄럽다면 약속을 왜 잡았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반문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마이조노와 약속을 잡았다.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잡았다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지난주, 마이조노는 후카와에게 두 장의 티켓를 들이밀었다. 후카와는 의아한 표정으로 마이조노의 얼굴과 티켓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러자 마이조노가 말했다. 같이 영화 보러 가실래요? 후카와는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고, 티켓과 마이조노의 얼굴을 한 번 더 번갈아 보았으며, 그 뒤에는 당연하게도 거절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마이조노는 몇 번이고 다가왔다. 영화관이 싫다면 다른 곳도 좋다고, 혹시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해달라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같았다.

 

"시.. 싫어."

 

방과 후 즈음이었고, 둘은 학원 내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으며, 마이조노는 여전히 약속을 권했고, 후카와 또한 같은 대답만을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째서죠? 이유를 알려주시면 제가 맞춰드릴 수 있어요."

 

마이조노가 거리를 좁히며 물었다. 후카와는 몸을 뒤로 물려 거리를 도로 넓혔다. 그러나 마이조노의 시선만큼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고, 그녀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후카와는 이때 마이조노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생각보다 끈질기다는 사실이었다. 이쯤 거절당했으면 인내심이 바닥날 때도 됐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시선을 허공으로 흘겼다가, 입을 열었다.

 

"애초에.. 왜, 왜 나랑 가려고 그러는 건데? 다른 애들이랑 가면 되잖아."

 

마이조노가 같이 놀러 가자고 권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아이들은 수두룩했다. 망설임 없는 것을 넘어서서 역으로 제발 같이 가달라고 간청할 아이들이 차고 넘쳤다. 그런 그녀가 다가오고, 제가 물러나고 있는 이 상황은 명백하게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답은 곧장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후카와는 의아해져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 쪽을 바라보고 있는 두 눈과 마주쳤다. 후카와는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려고 했으나, 마이조노는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후카와 씨와 함께 가고 싶으니까요."

 

그녀는 뒷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것이 온전한 답이라는 듯이. 후카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물며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잠시 주위가 고요해졌고, 그 고요를 거둔 건 마이조노의 웃음소리였다. 웃음소리라기보다는 웃으면서 터져 나온 자그마한 공기 소리에 가까웠다.

 

희미하게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과 교복 자락을 조금 흐트러놓았다. 어느새 해가 기울고 있었고, 주홍빛이 주위에 내려앉기 시작했다. 빛을 받은 마이조노의 머리칼이 고운 곡선을 그리며 흔들렸다.

 

"그러니까.. 같이 가주실래요?"

 

마이조노가 물었다. 후카와는 여전히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후카와는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이조노와 시선을 마주쳤던 순간, 그 눈 속이 얼마나 투명하게 보였는지를 떠올렸다. 그 뒤 그녀가 꺼냈던 말의 울림을 떠올렸고, 그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를 되새겼다. 그 말이 얼마나.. 자신에게 기묘한 감각을 안겨주었는지를.

 

후카와의 재능을 칭찬하는 이들은 뛰어난 심리 파악 능력을 자주 언급하고는 한다. 하지만 아무리 찬사를 받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범위가 정해져 있다. 그건 문학에서만, 자신이 세운 가상 세계 안에서만 적용되는 말이었다. 현실에서 타인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능력 따윈 그녀에게 없었다.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초고교급 문학소녀가 아닌 프로파일러나 독심술사가 되었을 테다. 그렇다고 타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방법 같은 것을 알지도 못했다.(오히려 비꼬아 듣는 쪽에 재능이 탁월했다면 탁월했지.) 그러나..

 

후카와 씨와 함께 가고 싶으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후카와는 아주 기묘한 확신을 느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그녀의 말을 듣는 일순간, 거기에는 한 치의 거짓도 담겨 있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목소리의 울림은 순수했고, 올곧았으며, 믿음을 주는 구석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 말은 함부로 부정할 수 없는, 외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후카와는 그 말에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후카와는 그 날 고개를 끄덕였던 일을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눈을 마주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고개를 저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이 영화 어때요?"

 

마이조노가 고개를 돌렸다. 후카와는 그 말에 겨우 잡념에서 빠져나왔다. 마이조노가 한 포스터를 가리키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후카와는 고개를 들어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파스텔 계열의 주홍색 하늘. 그리고 그 색이 드리운 두 사람이 서 있는 그림. 언뜻 보기만 해도 멜로 영화라는 사실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포스터의 하단에는 여느 멜로 영화처럼 사랑을 언급하는 상투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다.(“당신에게도 사랑의 기억이 있나요?”) 후카와가 포스터를 쳐다보고만 있자, 마이조노가 덧붙였다.

 

"사실 보고 싶었던 영화였거든요. 개봉한 지 꽤 돼서 이미 내려갔을 줄 알았는데.."

"아, 아무거나 상관없어."

 

후카와가 중얼거렸다. 어차피 영화를 즐기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영화를 보고 이 만남에서 벗어나고 싶을 따름이었다.

 

티켓을 표로 교환하고 오겠다며 사라진 마이조노는 잠시 뒤 두 장의 영화표를 가지고 돌아왔다. 정확히는 주머니에 영화표 두 장을 넣고, 한 손에 팝콘, 다른 한 손에 주스(두 개의 빨대를 꽂았다.)를 든 채로. 후카와는 그녀가 건넨 주스를 얼결에 받아들었다.

 

마이조노가 후카와의 빈손을 잡았다.

 

"이제 갈까요?"

 

그녀가 말했다. 마스크와 모자로 가려지고 남은 얼굴만으로도 그녀가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후카와는 그녀가 왜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나 할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후카와는 그녀의 손길에 이끌려 발을 내디뎠다.

 

 

 

 

둘은 좌석번호를 찾아 자리에 앉았다. 상영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침인 데다가, 개봉한 지 오래된 영화를 고른 탓이다. 몇 안 되는 사람마저도 띄엄띄엄 앉은 탓에 더 적어 보였다. 마이조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가 조심스레 모자를 벗고는 마스크를 내렸다. 조금 갑갑했는지 후우, 하고 호흡이 작게 새어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출입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영화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관객이 자리에 앉았다. 상영관의 불빛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한다. 금세 주위가 어두워지고, 스크린에 흐릿하게 비치던 영상이 선명해졌다.

 

시간이 흘러 도입부가 끝날 즈음까지 후카와는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마음이 불편한 탓이었다. 그녀는 결국 영화에서 시선을 떼고는 주변으로 시선을 굴렸다. 당연하게도 눈에 잡히는 것이라고는 별 게 없었다. 비어있는 좌석이나 사람의 뒷모습이 보일 뿐이었고, 그마저도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스크린에 닿아 퍼지는 옅은 빛뿐인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이 오가는 걸 눈치채지 못하기에는 충분한 어둠이었다. 영화에 집중한다면 누군가가 사라져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누군가가, 사라져도..

 

후카와는 끝말을 곱씹었다. 그 말은 갈고리처럼 기억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 기억이 얼핏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그녀는 어떤 충동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옆자리를 확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문득 자신의 사고가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를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스스로도 그것이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마이조노가 그때의 그 남자애처럼 벌칙 게임을 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설명하기 민망할 정도로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가 저를 골려주려는 속셈으로 이 약속을 잡았을 리도 없다.

 

그러니 그녀가 저를 혼자 두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후카와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른 시점에서 얼핏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후카와는 팔걸이를 손끝으로 몇 번 두들겼다. 그녀는 고민 끝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눈에 들어온 건 비어있는 좌석이 아니었다. 영화에 집중하고 있는 마이조노가 보였다. 예상대로 불필요한 확인이었다. 후카와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고는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떨쳐내고 영화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자꾸만 시선이 돌아갔다. 몇 번은 옆을 바라봤고, 몇 번은 바닥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신발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카와는 그 뒤로도 확인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왕복을 반복하던 그 순간이었다.

 

마이조노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고, 후카와가 굳었다.

 

"불편한 거라도 있나요?"

 

마이조노가 속삭였다. 후카와는 놀란 목소리를 숨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벼, 벼, 별로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녀는 간신히 말을 끝맺고는,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화는 어느새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장소를 보여주고 있었다. 후카와는 자신이 불필요한 확인을 위해 얼마나 긴 시간을 할애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 아니리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그녀는 영화에 집중하려고, 적어도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다고 생각될 즈음에, 후카와는 무심코 다시 옆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제 쪽을 쳐다보고 있는 마이조노와 눈이 마주쳤다. 후카와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가, 곧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비명이 먹혀들어갈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 바로 다음에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이조노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영화 대사와 배경음악이 천천히 귀에서 멀어져갔다. 스크린에서 반사된 빛이 피부 위로 드리운다.

 

호흡이 닿을 만한 거리였다. 후카와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잊은 채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의 어깨에 가지런히 자리 잡았던 머리카락이 사락, 하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어딘가 포근하면서도 여름을 닮은 향이었다. 두 눈이 마주쳤다. 영화의 한 장면이 마이조노의 눈동자 속에 비스듬히 담겼다.

 

"그렇게 쳐다보지 않으셔도 저 어디 안 가요."

 

마이조노가 속삭였다. 농담조의 말투였다. 말끝에 웃음이 묻어났다. 그녀는 말을 끝맺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와 달리 후카와가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짧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한동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가,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서야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좌석 팔걸이에 걸쳐두었던 손등에 온기가 닿았다. 후카와는 깜짝 놀라 손을 움츠렸다.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그 위로 겹쳐진 손을 보았고, 시선을 올려 마이조노를 쳐다봤다.

 

마이조노는 후카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후카와는 이 손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왜 그녀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영화는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후카와는 또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고, 그래서 고개를 돌리기로 했다.

 

영화는 재미있지 않았다. 영화는 한 사람을 비추고, 다른 한 사람을 비추다가, 어느 순간 두 사람을 비췄다. 미적지근한 템포로 굴러가는, 클리셰가 곳곳에 박힌 영화였다. 모호하고 미적지근해서 딱 그 정도의 미지근한 설렘을 안겨주는 영화. 그런 영화를 담은 스크린. 희미한 빛. 어두운 상영관의 내부. 그리고 손에 닿는 온기.

 

누군가가 사라지더라도 눈치채기 어려울 어둠 속이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손을 덮은 온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온기를 통해 그녀가 여전히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후카와는 더 이상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영화는 절정에 다다른 뒤, 천천히 내리막을 걸으며 끝을 맺었다. 두 인물을 담은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스크린은 거뭇해졌다. 일순간 상영관은 그 어떠한 빛도 없이 어두워졌다. 하얗고 작은 글자가 스크린에 비친 건 조금 뒤였다. 수많은 글자가 스크린을 메우며 올라갔다. 영화 중간에 나왔던 노래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주변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에도 스크린은 멈추지 않고 사람들의 이름을 실어 보냈다.

 

후카와는 사람들을 따라 일어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마이조노가 여전히 스크린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영관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갈 때까지 마이조노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녀는 영화를 보는 듯한 눈으로 얇은 글자를 응시했다. 마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을 보기라도 하듯이.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여러 이름이 천천히 올라갔다. 익숙한 어감을 갖고 있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이름들. 그런 수백 명의 이름이 흘러간다. 눈에 잡히지도 않으나, 잠시간 잡히더라도 곧 힘없이 잊혀질 것들. 마이조노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덧없는 것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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