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점심입니다. 좋은 저녁입니다. 좋은 밤입니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으니, 여러 방면으로 인사하는 편이 좋겠죠! 텐코의 이름은 챠바시라 텐코. 초고교급 아이키도가입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설마 불결한 남정네가 읽고 있는 건 아니겠죠? 그렇다면 당장 내려놓으십쇼! 으으, 텐코의 글을 남정네가 읽는다고 생각하니까, 소름 돋습니다…. 앗, 혹시 여성분께서 텐코의 글을 읽고 있는 거라면. 환영입니다! 글재주가 없는 데다 이야기가 중간에 끊겨 읽는 데에 의아함을 느끼실지도 모르겠지만. ー물론! 이런 일은 절대! 절!대! 없어야 하지만요!ー 그렇더라도, 부디!
이건 의미 없는 기록. 텐코가 살아있었다는 증거. 이 회고록이 당신의 손에 닿을 날을, 무척 바라고 있었습니다. 텐코는 당신의 곁에 있나요? 아니면 검은 틀의 액자 속에 갇혀 더는 숨 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나요?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텐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어떻게 해서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디,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텐코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나요?
[안지텐코] 챠바시라 텐코의 회고록
○월 □◇일
한낮의 태양이 익숙하던 텐코에게 새벽달은 너무나도 차가웠습니다. 불어오는 바람과 냉정해진 머리가, 이곳을 겨울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이슈 학원의 계절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에요. 착각은 청각마저 마비시키는 걸까요? 때 묻지 않은 추위에 귀가 얼어버린 게 분명하다고 느꼈습니다. 학생회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텐코는, 조금 쓸쓸한 감정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텐코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았습니다. 눈이 쌓인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지 씨와, 텐코를 생각해주는 상냥한 유메노 씨. 두 사람뿐이었어요. 하지만 그들의 대화 내용은 무척 비현실적이어서. 꿈에 와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잖아요? 신을 믿는 유메노 씨라니? 학생회를 조직한다니? 안지 씨가 학생회장이 된다니? 텐코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울어진 새벽달이 유메노 씨를 품에 안았습니다. 유메노 씨가 사라지고 안지 씨와 단둘이 남아버린 텐코. 공기 중에 흐르는 정적 탓에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늘 지나다니던 사이슈 학원인데도 불구하고,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 텐코의 고민을 여유롭게 무시하는 안지 씨. 입을 여는 타이밍까지 '위대하신 신님'이 정해준 걸까요? 안지 씨의 제안은 뻔하디 뻔한 이야기였습니다.
‘텐코, 학생회에 들어와. 우리 함께 사이슈 학원을 지키자.’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었습니다. 낮은 숨을 쉬고 고개를 기울여봅니다. 텐코가 믿는 건 아이키도 뿐이라고 말해봅니다. …….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텐코는 깨달아버렸습니다. 이 사람, 텐코의 말을 전혀 안 듣고 있어요! 텐코의 마음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뭐, 처음부터 들어줄 거란 믿음은 갖지 않았습니다! 답 없는 신 ー텐코도 이렇게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는 두 번째 학급재판 때 유메노 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구요!ー 때문에 무슨 고생인가요! 남정네였다면 텐코의 필살 네오·아이키도를 먹여주었을 텐데. 불가능하단 점이 원망스럽습니다.
무척 답답합니다. 우리 사이에 벽 따위는 없는데. 이리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건, 신의 탓인 걸까요? 텐코는 입을 꾹 다물어버렸습니다. 무언이 때로는 무기가 된다는 말을,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월 □▲일
요나가 안지. 그는 늘 ‘신님이 말해주고 있어’라며 신의 말을 읊습니다. 생각이 옳다며 강요까지 합니다. 텐코는 알고 있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안지 씨의 신이 하는 말은 모두 ‘안지 씨가 하고 싶은 말.’ 이라는 사실을요. 그저 자신의 말에 자신이 없을 뿐입니다! 안지 씨는, 자신의 생각을 펼치는 게 두려워 신의 뒤에 숨어버리는 사람인 겁니다.
그런 사람의 신 따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평범하게 이야기했다면 아무도 태클 걸지 않았을 겁니다. 텐코가 지켜주었겠죠! 그러나 안지 씨는 절대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할 신이라는 걸 만들고, 그 존재를 믿는 데에 그치지 않으며, 타인에게 세뇌까지. 오늘도 ‘신이 말해주고 있어.’라며 신의 이야기를 읊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떠오릅니다. 두 사람만이 남아있던 사이슈 학원의 앞마당. 안지 씨를 경계하고 있는 텐코에게 들렸던, 다정한 목소리.
‘키루미의 일로 벌써 네 명째. 텐코도 슬픈 거지? 더는 친구들을 잃고 싶지 않은 거지?’
그 말과 함께 텐코를 안아주었던 안지 씨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스한 품은 살아있는 인간의 체온이어서, 무심코 안심해버렸어요. 살아있음에 안심하는 세계라니, 역시 이런 곳은 불합리하다 느끼면서. 텐코는… 안지 씨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불합리한 세계에서 몇 번이고 시험당하던 정의를 끝까지 지키려면, 이 방법뿐이라고.
죄송하게 됐네요, 안지 씨! 텐코는 신 따위 믿지 않습니다! 이건 전부 유메노 씨를 위해서. 세뇌당한 다른 분들을 위해서! 이기적이고 의미 없는 행동이라며 텐코를 비난하셔도 상관없습니다! 텐코의 판단 아래, 최고로 좋은 방법을 택한 것이니까요. 텐코가 아니면 안지 씨를 막을 사람은 없으니까요! 안지 씨를 반드시 막아보겠습니다!
○월 ■※일
펜을 들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일이 지나갔습니다. 기세 좋게 시작한 학생회는 안지 씨의 제멋대로인 성격에 휩쓸려 불만의 소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하루카와 씨와 사이하라 씨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텐코가 스파이였다는 사실만 들킨 후입니다. 유메노 씨는 텐코에게 실망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어젯밤의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 더는 모르겠습니다. 마주한 안지 씨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텐코를 안아주었을 때의 안지 씨는, 저런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적어도 품에 안았을 땐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었는데. 이제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전부 과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건, 그가 남긴 말랍 인형과 남은 사람들의 기억뿐입니다. 텐코의 창백해진 안색을 누군가가 발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대로라면 유메노 씨가 걱정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안지 씨의 일로 많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텐코가 기운을 넣어드려야 합니다! 더는, 더 잃을 수 없습니다!
텐코의 세계가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긴 이릅니다. 이곳에서 나가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의 몫까지 살아야만 합니다. 누군가는 텐코와 안지 씨의 일을 지적할지도 모릅니다. 안지 씨와 대적했던 텐코는, 의심 받기 충분한 걸요. 하지만, 텐코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않습니다. 이건 하루카와 씨와 사이하라 씨에게도 전했던 이야기. 텐코가 범인으로 몰리는 한이 있어도, 안지 씨를 죽인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월 ※*일
아, 그렇지. 신구지 씨의 제안으로 강령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안지 씨의 영혼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그래, 텐코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안지 씨와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안지 씨. 텐코는 곧 당신을 만나러 갈 겁니다. 범인의 이야기를 준비해두세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신이 아닌, 당신의 목소리를 듣겠습니다.
* * *
타인의 의지로 인해 무너져버린 사이슈 학원. 끝나버린 세계. 세계의 일부였던 초고교급 미술부의 연구 교실에는 마찬가지로 세계의 일부였던 한 사람이 앉아있다. 차분한 백발은 두 갈래로 곱게 묶어 저녁 하늘의 색을 가만히 받아내고 있었다. 새하얀 손에 쥐어진 노트는 녹색을 등에 둘렀다. 투박하게 적혀진 글자를 한 글자씩 눈에 담던 그는, 이내 짧게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엔 어려움이 없었다. 눈을 접어 웃고선, 상대방에게 양팔을 벌려 환영한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어서 와, 텐코. 기다리고 있었어~”
“어디서 무얼 하나 했더니, 아직도 여기 계셨던 겁니까? 어서 돌아갑시다!”
무너진 세계에서 문을 여는 행위는 의미가 없었다. 잔해를 밟고 천천히 걸어들어온 텐코는 책을 읽고 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맞닿은 손바닥, 엮인 손가락. 여유로운 미소의 그와는 다르게 조금 불편한듯한 기색.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그는 완성되지 않은 일기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린다. 읽고 있었던 노트를 꺼내어 입가에 가져다 대어본다. 금세 변하는 텐코의 표정이 꽤 볼만 했다.
“텐코. 텐코는 안지에게 도움 되는 사람이었어.”
“갑자기요? …어, 어라? 그, 그건 또 언제 찾으신 겁니까?! 잘 숨겨두었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에~? 읽어주세요~ 하고 떡하니 놓여있던걸? 안지는 놓여있는 책을 읽었을 뿐이라고?”
“안지 씨가 읽어봤자 도움 되는 건 하~나도 없을 겁니다! 빨리 가요! 늦었어요! 다들 기다립니다!”
“안지가 읽어봤자 도움이 안 되는 걸까나~”
투덜거리던 걸음은 점점 속도를 빠르게 내더니 앞으로, 더 앞으로 나아간다. 내일을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빛을 향해 달린다. 생기 따위 없는 손바닥을 마주 잡고.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안고. 서로의 머리카락 색, 눈 색 따위를 새겨 넣으며. 존재하지 않는 내일을 향해.
“신님이 말해주고 있어. 텐코의 다음 이야기에도 안지가 주연이라고.”
“절대 아닙니다!”
다음 이야기가 쓰이지 않을 노트는 사이슈 학원의 잔해 틈에 남아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은 채. 그렇게, 끝을 맞이한다.
